클로디아가 말했다.
"불가능한 건 없어요."
클로디아의 말은 엉성한 연극에서 서툰 배우가 말하는 것과 똑같이 어설프게 들렸다.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클로디아, 사람이 여든 두 살이 되면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고,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단다."
"불가능한 건 없어요."
클로디아의 말은 엉성한 연극에서 서툰 배우가 말하는 것과 똑같이 어설프게 들렸다.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클로디아, 사람이 여든 두 살이 되면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고,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단다."
조금 고민인 것이, 요샌 도무지 뭘 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안든다는 거다. 남과 무슨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도 안들고, 뭘 완성해서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그나마 남은 희미한 욕구가 이미 질러 놓은 것들에 대한 마무리나 짓자, 정도고. 인생 한 백년 격동적으로 살고 '다 이루었다'고 한숨 내쉴 만한 처지나 되면서 이러면 고민할 일이 없는데 아직 한창 나이에 -_-;; 이러고 있으니 내 안의 착한 내가 나를 걱정한다.
아무튼 그런 의욕부진의 한 맥락으로, 책도 예전에 읽었던 것들이나 뒤적뒤적 찾아보고 있는데 그중 또 하나가 이 클로디아의 비밀. 역시 어린 시절 최고의 장서 -_-; 계몽사 아동문학 전집 중 한 권으로, 케스트너의 동화나 소공녀, 소공자 시리즈가 나름대로 메이저 (...) 급이라면 이건 상당히 마이너.. 취향이었던 것 같다. 미국 사는 꼬마기집애 클로디아가 무료하고 개성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동생 제이미와 함께 가출을 해서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숨어 살다가 겪는 사소한 모험담이다.
사실 케스트너의 동화나 소공녀, 소공자에는 강력한 이야기의 힘이라는게 있다. 정글북도 그렇고. 소년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요소가 분명히 보인다. 그런데 클로디아의 비밀은 안 그렇다. 미스테리가 있지만, 솔직히 애들이 좋아할 법한 미스테리가 전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는 참 좋았다.
기억 속에서, 이 책의 장점은 클로디아와 제이미라는 캐릭터였다. 나한테는 이 아이들이 미국 아이들이라기 보다, <서울 애들> 같은 깍쟁이로 느껴졌고, 그래서 서늘한 매력이 있었다. 불쌍하다거나, 부당하게 핍박받는다거나, 그런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분명히 메이저급 동화의 격렬하고 곡절 많은 캐릭터들에게도 매력이 있었지만, 유달리 안 그런 이 남매들도 상당히 신선한 맛이 있었다. 나한테는 또 이 남매를 연상시키는 외사촌형제가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 책에서 자극받을 수 있는 '맛'은 주로 '과자' 맛이었다. 클로디아와 제이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숨어 살기 때문에, 폐관 시간이 되면 은신 장소에 숨어 있다가 관람객과 직원들이 모두 물러간 다음에야 나와서 르네상스관의 골동품 침대에서 잠을 잤다. 당연히 야식을 사먹으러 나갈 수 없다. 그래서 밤새 배고픈 경험을 하고나서는 폐관 시간이 되기 전에 크래커를 잔뜩 사서 주머니에 쑤셔넣고 그거로 긴밤의 공복을 달래는 장면이 나온다. 티나 크래커였나? 짭짤한 크래커 사이에 땅콩 샌드를 얇게 바른 과자를 먹으면서 이 장면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 버린 초콜렛을 남동생 제이미가 주워먹고 죽는 시늉을 하는 장면도 있는데, 이 장면에서 연상되는 초콜렛의 맛은 보통 가게에서 구할 수 있는 가나 초콜렛 같은 맛이 아니었다. 앞에도 말했다시피 나한테는 방학 때 이따금 서울 가서 만나는 외사촌형제들이 있었다. 내 또래인 그 아이들이 아주 이상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을 목격한 기억이 있다. 일단 사촌 남동생은 미니카라는 것을 모으더라. 신기했다! (....) 우표 말고 다른 걸 모을 수도 있다니. 게다가 '지우개'도 모으더라. 그 지우개들은 각종 외국의 국기 모양이라든가, 과일 모양 등등 동네 문방구에서는 감히 찾아볼 수도 없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독특한 지우개들이었다. 초콜렛 모양 지우개도 있었고, 오렌지 모양 지우개도 있었는데, 냄새 또한 초콜렛, 오렌지 향이었다. 문제는, 이 콜렉션용 지우개는 절대 글씨 지우는 용도로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항상 완벽한 형태를 유지한채 향긋한 냄새만 폴폴 풍긴다. .... 먹고 싶게시리.
사촌 형제의 어머니, 즉 이모님은 아이들 간식용의 초코바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가끔씩 꺼내주곤 하셨는데, 이것 역시 내가 살던 소도시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형 스니커즈 비슷한 건데, 수입식품이었던 듯 하다. 그냥 가나 초콜렛 이런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낯선 맛이었고, 맛있어서가 아니라 신기해서 먹었던 그런 기억이다. 그런데 이 초코바와 그 초코 지우개는 모양과 냄새와 크기가 대략 비슷했다. ..... 불과 일이년 사이에 지우개 모으기라든가 특이한 연필 모으기는 내가 살던 소도시에도 전파되긴 했다. 사촌형제가 나한테 그 초코바 지우개를 주었는지, 아니면 일이년쯤 뒤에 내가 비슷한 초코 지우개를 샀는지, 그도 아니면 하도 먹고 싶어서 그걸 슬쩍 했는지는 기억이 희미해서 분간이 안가는데, 아무튼 그 물건(혹은 그와 유사한 물건)이 내 소유가 된 어느날. 그 초코 지우개를 한번 먹어본 일이 있다. (....) 물론, 지우개는 지우개 맛이었다. 웩. 이 기억 때문인데, 좀 웃기지만 클로디아의 비밀에서 초콜렛이 나오면 나는 이모님이 주던 초코바의 오묘한 맛과, 초코향 지우개의 고무맛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었다. 웩.
마지막으로, 두 남매가 미술관의 분수대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는데, 발바닥에 뭔가 차가운게 밟혀서 보니까 소원을 빌면서 관람객들이 던진 동전이었다. 뜻밖의 부수입을 챙긴 남매는 다음날 나름대로 '성찬'을 차려 먹는데, 이 장면은 정말 큰 미스테리였다. #%#%#$라든가 @#$%@#%라는 무슨 패스트푸드를 먹은 것 같은데, 그때 당시 나는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강원도 소도시에서 자란 나는 큰 의문에 잠겼다. -_-a 이것은 서울 아이들, 혹은 미국 아이들이나 먹을 수 있는 정체불명의 무엇이다. 그 무엇은 대체 어떤 맛일까!??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클로디아의 비밀을 보았다. 크래커 부분은, 뭐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콜렛 부분은, 역시 고무는 먹을게 못된다라는 교훈을 되새겨 주었다. 반면 이모님이 주셨던 초코바는 요새의 스니커즈 같은 초코바보다 땅콩이나 누가의 비율은 적고, 마쉬맬로우 같은 것이 많이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 기억보다 훨씬 달지도 모르겠다. 노란 맛이 아니라 흰 맛이었다, 라는 감각이 어렴풋이 살아난다.
마지막으로 서울 아이들이나 미국 아이들만 먹는 그 정체불명의 무엇(...!)은 ... 지금 와서 읽어보니 어디에도 없다. 이해 못할 음식이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오호, 여기서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미국의 식문화가 얼마나 우리들 생활 깊숙하게 들어와있는가를 개탄해야 하는건가 잠시 고민이. -_-;;
<클로디아의 비밀>은 수십년만에 다시 봐도 좋았다. 아니, 어려서는 그리 크게 감탄하지 못한 부분에도 감탄하게 되었으니 '더' 좋았다고 봐야겠다. 그 사이에 나는 '좀 더 확고한 마이너 취향'을 갖게 된걸까? 이 책에 대해서 짧게 말한다면, <딸년이 있으면 꼭 읽혀주고 싶은 책> 이다. -_-b 비밀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나이 먹어 읽어도 여전히 폐부를 찌른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진리는 왠지 아들놈하고는 꼭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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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좋아했던 사람이 있다니 어쩐지 기쁨 마음ㅇ_ㅇ;;
2007/09/30 06:09좋아했던 포인트는 다르긴 하지만 말이에요. 전 두사람의 모험(?)이 좋았거든요. 어디가서 클로리아라도 된 듯 구석을 찾곤했더랬지만.
안그래도 요즘 정서가 메마르는것 같은데 새로 읽고 폐부를 찌르는 비밀의 가치를 읽으면 세상의 이치가 좀 깨달아질라나;;;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도 못했는데
2007/09/30 07:52마님이 비밀의 가치를 말하시니
괜히 마음이 설레네요. 두근두근
정말 비밀의 가치는 뭘까요? 당장 읽어봐야겠습니다.
앗 안녕하세요. 저는 이 책을 ABE 전집으로 봤어요. 흐흣. 삽화가 예쁘지 않아서 조금 놀랐었던 것 같아요.
2007/09/30 15:34진산님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2007/10/02 16:03요즘 들어 글솜씨가 굉장히 줄어든 느낌ㅇ입니다.
글을 길게 못 쓰겠습니다..
표현력이 줄어든건 아닌것 같은데 말이죠..
그렇다고 독서를 안하는 것도 아닙니다. ㅠㅠ
-_-a 저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야 글이 잘 써질지 알면 안 이러고 있지요. 왕도가 없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당장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있잖아요? 글쓰기도 그런 쪽인듯 합니다.
2007/10/02 18:38저 이 책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2007/10/05 21:35전질류는 절대 않사주시던 가풍에서 어째 이런책이 낱권으로 남아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궁금하기도 하지만 조카에게 사주고 싶어도 없어서 고민이였는데
(제 책은 절대 않주는 짠순이...ㅡㅡ;
다시 재간되었다니 기쁘네요.꼭 어렸을때 헤어진 동네 친구를 우연히 만난 느낌?
게다가 저 책에 나오는 남매처럼 제 동생과도 툭탁거리고 싸우던터라 내용이 무척 와닿았어요.
특히 탈출시 비닐의자에 볼을 댄부분이나 침대에서 난다던 곰팡이 냄새 같은 세세한 문맥이
아!나 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하구나 하며 글쓴이의 표현이 참 재미있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인 동생이 빌려온 책 훔쳐읽(...)으면서
2007/10/06 13:57너무나 재밌어서(...) 나는 어째서 대학생씩이나 돼서 초딩이들 책을 좋아하는가
자괴했었는데 마님께서 재밌는 책이라고 해주시니 감사, 감사.
가출청소년 얘기를 들을 때마다 으그 저 계획성 없는 것들-_-이라며 혀를 찼는데
이 맹랑한 꼬마들은 너무나 체계적인/성공적인 가출을 해서 크나큰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이 나이 돼서 나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한 번 가출해볼까 생각했더랬죠 ㅋㅋ
이 책의 제목을 여기서 알게 되는군요
2007/10/08 22:53아주 오래전 제가 중학교때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줄거리는 기억이 나는데 도무지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선물 받은 기분입니다.
이번에 기회를 만들어 다시 읽어봐야 할것 같네요*^^*
...아들은 안 되나요...
2007/10/13 14:51좋은 위치! 너를 감사하십시요.
2007/10/18 04:36강원도 산골 소도시 그곳이 어디일까요? 전 지금 그곳에 살고있습니다
2007/12/27 12:01친구는 너의 위치의 현재 팬이 되었다!
2008/03/13 05:45너의 위치를 방문한 즐기는!
2008/03/13 06:35많은 감사 우수한 위치! 나는 너의 웹사이트를 사랑한다!
2008/03/13 07:34관심을 끌. 너가 동일할 좋을 지점을 다시 배치할 것 을 나는 희망한다.
2008/03/13 08:24나의 친구는 너의 위치의 현재 팬이 되었다!
2008/03/13 09:24관심을 끌. 너가 동일할 좋을 지점을 다시 배치할 것 을 나는 희망한다.
2008/03/14 03:14